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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변의 일상을 위한 반(反)기념비

이선영(미술평론가)
서교동의 아트스페이스오에서 열린 최성임의 ‘HOLES’ 전에는 구멍을 연상시키는 둥근 이미지들이 벽과 천정,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에 산재한다. 그것들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도 서로를 반향 한다. 하얀 빛이 쏟아지는 천정의 둥근 원들은 어둑한 지하 전시장의 유일한 광원이 되고 있어, 지상으로 뚫린 구멍처럼 보인다. 광원이 있는 작품 아래 서면 위로 순간이동을 할 것 같다.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작동되는 순간 아래의 둥근 단은 무대가 될 것이다. 이때 구멍은 지금여기를 벗어나는 탈주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멍 아래로 쏟아지듯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도 둥근 공의 형태들이며, 작품을 누워서도 볼 수 있도록 놓아둔 하얀 쇼파도 둥글다. 동글동글한 것들이 여러 형태로 변주되는 최성임의 전시 ‘HOLES’는 모든 것이 빠져 들어가거나 튀어 나오는 구멍들을 연상시킨다. 우주에는 블랙홀/화이트홀이라 불리는 그러한 구멍들이 있어서 차원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러한 우주적 구멍들에는 우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비밀도 감춰져 있다고 여겨진다.

플라스틱 볼풀공 같은 아이들 장난감에서 소재를 취한 최성임의 작품은 형이상학으로 비약될 수도 있는 그러한 고차원적인 진리를 말하지는 않는다. 어떤 종류의 ‘개념 미술’은 저 상층부에 있다고 생각되는 ‘순수한’ 관념으로부터 출발하곤 한다. 거기에는 관념이 사물과 육체로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 사항이 있다. 반면 최성임이 이 전시에서 제시하는 구멍들은 그러한 금기들을 위반하는 불경한, 혹은 신성한 비유로 다가온다. 구멍은 흘러넘치게 함(또는 누수시킴으로서)으로서 경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이나 종교학, 그리고 심리학은 신체의 구멍들이 얼마나 많은 금기사항과 연결되어있는지를 알려준다. 예술이 순수한 정신이 되기 위해 관념의 유희를 일삼을 때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어지며, 자신이 가진 고유의 풍부한 색은 흑백의 창백한 추상으로 환원되고 만다. 예술의 제도화는 그러한 환원을 더욱 부추키곤 한다. 반면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 자신이 지금 속해 있는 일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찬가지로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절박한 신호를 보내는 부류들도 있다.

최성임이 근 몇 년 새 여러 전시장에서 선보인 재료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것들은 빵 끈부터 각설탕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생활 속 재료들에서 온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재료들은 그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재주의, 또는 특정 소재를 도구적으로 동원하는 개념적 예술일 것이다. 타인의 노동력과 자본을 대거 동원해서 공간을 가득 채워나가는 스펙터클한 양식은 영화 같은 매체를 염두에 둔다면 그다지 효과적인 미술의 전략은 아니다. 최성임에게 생활 속 재료들은 작품이라는 상징적 우주를 구축 또는 구성하기 위한 원자적 요소들이지만, 재료가 주는 가벼움 또는 소박함은 작품의 메시지나 작가의 태도에 대한 일말의 힌트를 준다. 작가는 일상에서 샘솟은 아이디어를 전시장이라는 한 공간에 아이들 놀이터의 볼풀공처럼 가득 펼쳐 놓는다. 일상에서 발견한 재료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위해 연출한 무대의 배역을 맡는다. 작가가 촉발시킨 작은 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외연과 내포를 늘려가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일상적 소재를 일상적 노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섬세하게 갈무리하는 솜씨가 발휘된 작품들은 흔히 ‘여성적’이라고 말해진다. 어떤 종류의 페미니즘이 여성성을 그런 식으로 한정시키기도 하지만, 최성임의 작품은 그러한 여성성조차도 굳이 거부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도 포함한다. 비속어에서부터 은근한 비유에 이르기까지 ‘구멍’이 야기하는 여성적 함의도 부정할 수 없다. 비천과 숭고 사이를 공 튀기듯 오고갈 뿐, 여성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은 만물을 낳는 대모나 성모같은 신성한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극단적 포르노그래피에서 여성은 하수도같은 구멍으로 환원된다. 구멍은 부질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욕망의 출입구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설치된 작품이 밝고 화사하다고 해서 그러한 어두운 면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HOLES’는 최성임이 출발하는 일상과 더욱 밀접하다. 그 일상은 밤낮으로 이루어진 하루처럼, 밝은 면만큼이나 어두운 면으로 이루어진다.

하루하루 일상을 영위하는 인간의 몸 자체가 구멍으로부터 나와 구멍으로 돌아가는, 그리고 구멍들로 이루어진 유기체 아닌가. 태어나 성장하고 죽으며, 조금씩 변형되는 구멍의 형세들이 바로 인생 아닌가. 전시장에 설치된 구멍 여섯 개에서 쏟아지듯 내려오는 것은 연동운동을 하는 장 같은 또는 알뿌리 같은 또는 동식물성이 모두 포함된 줄기들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그물망인데, 흔히 앙파나 배추, 달걀이나 귤 같은 것을 포장하는 재료로 사용된다. 공의 내부는 비어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껍질이 싸여있는 모습은 까도까도 끝없는 양파같은 존재, 아니 관계를 암시한다. 메인 공간의 설치물을 반사하는 벽의 드로잉 작품들은 나열이나 분열의 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표면에 방점을 찍는 것은 마찬가지다. 후기 구조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이 암시하듯, 표피, 또는 바깥은 알맹이 또는 내부보다 더 심오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베란다에 걸려있던 양파 망에서부터 영감을 받았다. 줄기를 이루는 망의 양 끝은 막혀있지 않지만, 워낙 쫀쫀해서 내용물이 밖으로 빠져 나오지는 않는다.

이 열려있으면서도 닫혀있는 줄기들을 바닥에 닫지 않음으로서, 보이지 않는 상층부의 아랫부분이라는 비유를 강화한다. 나무로 친다면 뿌리 부분, 성장으로 친다면 거꾸로 자라는 나무의 이미지이다. 통상적으로 지하의 세계는 보이지 않지만, 작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모저모를 색과 빛과 형태의 유희를 통해서 환하게 비춰준다. 예술이 맡은 역할 중의 하나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세계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정치적 행위와 함께 기존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지면 아래의 세계는 이질적이기는 하지만 음침하지 않다. 반대로 축제적인 분위기까지 있다. 일견 오색찬란한 설치물이지만, 신호등 색처럼 기계적으로 정해진 듯한 평범한 색의 계열이다. 그러나 그 망들에 끼워있는 볼들의 간격은 독특한 리듬감을 형성한다. 작가가 하나하나 직접 끼웠기에 기계적인 반복이 아닌 리듬이 있다. 그러한 리듬감은 기계적 박자와 달리, 살아있는 생명에 특유한 것이다. 처마에 걸린 곶감이나 조기, 양파가 관상용이 아니듯이, 최성임의 설치물은 다양한 상호작용을 유도한다.

흰 소파에 누워서 보면  빛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또는 그곳으로부터 이곳으로 다가 오는 존재의 연쇄 망 같은 느낌을 받는다. 비록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신성한 존재의 그물망은 파괴되었지만, 예술은 지난 시대의 종교를 대신해서 분리된 것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곤 한다. 존재보다는 관계를 중시해왔던 여성들의 작품이 만물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태적 사고와 그토록 친숙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전시장 곳곳에 듬성듬성 설치된 집합체들은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을 보면서 섞이는 풍경을 연출한다. 드로잉들이 걸린 검은색 가벽에 비친 설치물들은 서로를 비춘다. 연필로 가늘게 그어진 드로잉들이 공간화 된다면 플라스틱 공 같은 경량 재료로 하나하나 꿰어 드리워 놓은 3차원 드로잉이 될 것이다. 최성임의 작품은 2차원이든 3차원이든,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며 진행된 그 시간의 축적이 오롯이 남아있음에서 오는 감흥이 있다. 예술에서 도약과 비약만을 원하는 이는 이러한 부분들이 답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약과 비약도 일정정도의 축적이 요구된다. 도약은 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는 무를 낳을 뿐 변화를 야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무의식과 광기는 그자체로 예술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물론 의식과 이성은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양자 간에 뚫린 구멍들이다. 한시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생명체에게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진 시간들은 박탈감과 허무함을 자아낸다. 예술은 허무하게 흘러가는 인생에 있어서 그러한 결정적 흔적을 만들어내는 몇안되는 분야이다. 그러나 최성임은 ‘영원한 예술’이라는 지난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 하지는 않는다. 작가에게 예술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프루스트)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소중할 뿐이다. 모든 설치작품의 운명이 그렇듯이 전시라는 한시적인 기간이 끝나면 이삿짐 싸듯이 철거를 해야 할 것이다. 최성임에게 철거는 설치의 시작만큼이나 의미 있다. 상자 안에서 나온 소소한 재료들이 일정시간 동안 펼쳐지고 다시 접혀져서 상자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장에서 펼쳐질 것이다.

이러한 펼침과 접힘 사이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최성임의 드로잉에는 그다지도 섬세한 주름들로 가득한지도 모른다. 펼침과 접힘이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다원적 우주를 생성하는 주름은 철학자 들뢰즈에 의하여 지난 시대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비유로 강조되었다. 일상 공간의 한켠을 차지하는 작은 작업실에서 작은 점으로 시작된 아이디어가 점차 증식되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전시회는 그러한 드문 기회를 주고, 그 기회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그것이 다시 펼쳐지는 시공간의 차이만큼 펼침의 양상은 또 달라지기 때문에--이기에 더욱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 이러한 일회적 속성은 재현주의를 거부한다. 그 순간 일상을 특징짓는 진부한 기계적 반복은 차이를 향한 반복으로 전이된다. 최성임의 ‘HOLES’는 특히 일상과 예술의 경계에 난 구멍을 말한다. 이 구멍이 없다면 일상은 기계적 반복으로 질식할 듯한 고갈을 낳을 것이며, 예술은 차이를 가늠할만한 적절한 물적 토대를 찾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구멍은 양자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이나 어느 하나로의 쏠림이 아니라, 수시로 왕래하는 통로를 지향한다. 구멍들로 인해 살아있는 세포막에서 일어나는 기제와 같은 개폐작용이 가능하다.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DNA같은 구조적 요소가 아니라, 원활한 생명활동을 조절하는 막이다. 어떤 입자는 통과시키고 어떤 입자는 차단하는 막의 역학을 가능하게 하는 구멍들은 실체(본질) 보다는 관계가 생명에도 중요함을 알려준다. 생명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에도 중요하다. 그 역도 성립될까. 자연과 예술은 다양성의 원천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만 강조해 두기로 하자. 원이나 구는 닫혀있는 소우주의 느낌을 주지만, 최성임의 작품에서 원이나 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여럿이 야기하는 관계망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열려있다. 최성임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한정이 있을 뿐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동안 서로 다른 것들을 이어왔던 관심사의 연장이다.

드로잉은 긋기를 통한 잇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최성임의 작품의 상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별히 검은 벽면에 13개의 액자를 한 평면들을 간격 없이 죽 붙여 놓았다. 짙은 블루가 들어간 블랙 ‘미드나잇블루’로 칠해진 벽면에 창문처럼 뚫린 하나하나의 액자 안에는 꿈결 같은 섬세한 결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이 자리한다, 띄어쓰기가 안 된 글자가 있는 작품처럼 가독성은 없지만, 어떤 감정의 파장이나 단면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해변에서 기이한 조가비를 수집하는 듯한 기분으로 다양한 선의 계열이 샘플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드로잉은 보거나 읽기 위한 형상들이 아니라, 설치의 일부분이다. 드로잉들 사이에는 이번 작품의 영감을 준 양파 망이나 실뜨기 사진과 동글동글한 자갈이 가득 깔려있는 해변 사진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짜기, 엮기, 잇기 등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의 방법론을 압축한다.

사진과 드로잉, 설치물들은 하나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보충하는 관계를 가진다. 전시 때마다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몽돌해수욕장 사진에 나오는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닷물과 그 옆의 돌멩이들처럼 서로는 서로에게 끝없이 작용하고 반응한다. 순환하는 달의 주기를 따라 물은 돌을 연쇄적으로 움직이고 돌의 움직임이 만든 소리들은 작가의 (무)의식을 자극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또 다른 관계망들로 이어진다. 죽 붙여진 평면작품들에서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 않으며, 우선권이 없다. 그것은 6개의 설치물이 상호간에 특정한 관계를 가지기보다 듬성듬성 배치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씨앗과도 같은 작은 시작들, 작은 시작이 점차 증폭되며 변주되는 과정들, 마침내는 평면을 넘어서 3차원까지, 또는 그 이상의 차원까지 오고가며 음미되고 읽혀진다. 최성임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드로잉은 시작의 의미를 가진다.

작가는 선긋기를 할 때 어릴 때 취미로 배웠던 서예 시간에 끝없는 선긋기부터 시작했던 때를 떠올린다. 차례차례로 순차적으로 행해지곤 하는 최성임에게 드로잉은 글쓰기와의 연결고리를 알려준다. 그것은 공간에 구현된 시간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한 말이나 글처럼 시점과 종점을 잇는 단선성을 가지지 않는다. 말과 글은 (상대적인)단선성 때문에 논리적이며 투명하게 다가온다. 반면 공간적인 양식인 조형예술은 공시적 구조를 가지기에 말로 친다면 동시적이다. 그것들은 웅웅거리거나 침묵한다. 조형언어는 언어의 단선성에 못 미치거나 단선성을 극복한다. 미술이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순간 그 매체가 가진 단점이 튀어 나온다. 그래서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 미술은 종합예술인 연극을 빌어 서로를 보충하는 어법을 활성화시켜왔다. 최성임의 전시장 역시 그러한 연극무대의 속성이 농후하다. 어느 하나도 결정적이지 않지만, 전체가 어우러져 관객의 지각을 활성화시키고, 그 체험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방식 말이다.

최성임의 드로잉에서 켜켜이 자리한 선들은 거듭된 시작일 뿐 어떤 목적지를 향한 연장이 아니다. 어디를 향한 이동이 아니라, 정처 없는 유랑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동들이다. 그러한 선적 흐름은 미세한 것들의 집적이 주는 힘, 즉 메아리처럼 되울려오는 반향들을 야기한다. 흐릿한 선들을 더욱 흐릿하게 보일 수 있는 유리를 끼우고, 벽을 검게 한 것은 미세한 반향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HOLES’라는 제목은 글쓰기나 말하기, 또는 드로잉의 자연스러운 선적 흐름만큼이나 단절을 말한다. 구멍은 흐름을 만들면서 동시에 흐름을 방해한다. 흐름 속 방해는 반복 속 차이를 만들어낸다. 구멍은 행간이고 말(글) 속의 침묵이다. 최성임의 작품에서 좁은 통로에 서로 다른 간격으로 끼워진 공들은 문자의 열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볼록한 부분만큼이나 오목한 부분도 메시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글자와 행간이, 발언과 침묵이, 소리와 잡음이, 의미와 무의미가, 의식과 무의식, 밝음과 어둠이 이 서로에게 가지는 관계처럼 말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구별될 수 있는 두 가지 항들은 공들이 통로 속에서 자유롭게 배치되고 또 그 안에서 미끄러질 수 있는 것처럼 가변적이다. 그러한 그림 문자들이 무대를 만드는 최성임의 전시는 꿈의 언어처럼, 미지의 상형문자처럼 해독 불가능하지만, 그만큼 매혹적이다. 천정 또는 또 다른 층위의 밑바닥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연쇄 망들은 꿈처럼 강렬하지만 읽으려하면 모호한, 잡으려 하면 슬쩍 몸을 뺀다. 공기방울같이 가벼운 느낌의 재료, 반투명한 껍질, 종이 위에 옅게 그어진 선들, 이 모든 이미지들은 있음 보다는 없음에 더 친숙하다. 동양에서 말하는 무(無)나 공(空)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시작만 있을 뿐 끝이 없는 최성임의 작품에서 무나 공은 죽음을 향하지는 않는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듯이, 반복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삶이라는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복(죽음)일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 전시에서 끌어들인 돌고 도는 원이나 구, 구멍은 삶과 죽음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