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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집-채우기 혹은 일상의 몰수  

최성임의 <발끝으로 서기>를 위한 시론
양효실(비평)
 
예술가란 표상에 이미 항상 젠더 표식이 붙어있었다는 것은 주지하듯이 역사적 사실이다. 예술가는 천재로서, 예외적 개인으로서, 나아가 소외된 노동에 침윤된 근대의 타자인바 미적 노동자로 추앙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이디어의 착상, 수개월의 창작의 고통, 마침내 작품의 출산과 같은 은유는 썼지만, 실제 여성의 임신·출산·양육은 생물학적 암컷의 경험으로 폄하했고, 대체로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기에 육체노동자의 대량생산 공장 시스템에서의 경험인바 소외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부르주아 남성 엘리트 예술가의 여성 경험의 전유는 실제 여성의 경험과 무관했고, 근대적 산물로서의 예술은 그렇게 계급적이고 젠더 적인 자신의 특수성을 감추면서 보편적 가치를 획득했던 것도 사실이다.

남편과 아버지를 예술가로 둔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여성들, 유모나 침모와 같은 하층계급 여성들(서발턴?)의 도움을 받으며 현모양처이자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누렸던 최상층 여성들을 제외한다면, 가사 일을 하면서 작업을 하는 여성은 어디서든 펜과 종이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문학의 영역을 제외한다면 극히 예외적이었다. 임신을 한 채로 미술학교를 다니던 여성들은 ‘이제 작업은 할 수 없겠구나’란 말을 수업 선생들에게 들었다고 전해지고, 따라서 결혼생활과 창작활동을 함께 하려 했던 여성들에게는 예술로 번역할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이 있었지만, 손에 오롯이 ‘묻은’ 일상을 손작업을 통해 번역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지하거나 해석해줄 비평, 담론은 기존 미술계에서는 제공받지 못했기에, 늘 ‘진지하고 지적인’ 작업이 아니라는 평가 앞에서 우물쭈물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남성 예술가들이 즐겨 운운하는 거창한 이념이나 위대한 형식의 프레임 안에서 이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면서도 작업을 놓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변종들!)은 일종의 ‘부역자’로서, ‘명예 남성’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업의 젠더적 특성을 지운 채로 전유되고 이해되었다. 결국 페미니즘은 이들 어정쩡하게 기존 남성 프레임에 찡겨 있거나, 자기부정으로 내몰렸거나, 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잊혀진 여성들을 위한 장소·방법론으로서 도착할 게 당연했다. 여성 예술가들에게는 ‘너머’를 보거나 ‘불가능’을 모색하는 남성 작가들은 포착할 수 없는 일상적인 경험, 지금-여기의 시시함, 사소함, 구어체로 적힐 수밖에 없는 생생한 관계들이 있다. 그들은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식사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걷는 손의 감각이 너무나 생생하고 절절하게 존재한다. 붓을 쥐고 온갖 매체를 손에 들거나 만지는 행위가 예술가가 자신의 (미적)사랑을 고백하기 위한 시작이라면, 여성 예술가는 이미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다시 그 손에 자신을 위해 또 매체를 쥐는 과정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주부-예술가는 ‘가족을 위한’ 노동과 ‘작가 나를 위한’이란 작업이란 이분법을 통해 헌신/소외와 이기심/충만을 오고간다고 볼 수 있다. 가사일은 당연히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이의 성취가 아내와 엄마의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전(前)-페미니즘적이다. 그것은 덤이고 음화이고 잔여이고 생색이다. 가사 일을 감내하는 무임금 노동자이면서 자기를 위한 작업을 하는 미적 노동자이고자 하는 이 기이한 타자들의 욕망은 충분히 기록되지도 가시화되지도 않았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쟁취하는 것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여성들, 고작 부엌에서야 곁-작업실을 가질 수 있는 여성들에게는 자기 자신으로서도 살았음을 증명하는 필사적인 투쟁, 노력이다. 주부 작가들은 부엌에서 잠시 짬이 날 때마다 쪽-글을 써서 이어 붙였고, 또 어떤 동시대 예술가들은 잠시 부엌을 몰수해 작업실로 바꿔버린다. 그들은 남는 시간에 짐승처럼 잠을 자지도, 친구와 수다를 떨지도 않은 채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조각난 자투리 시간을 이어붙이면서 뭔가를 만든다. 유부녀 예술가, 결혼을 하고도 작업을 하는 여성들이야말로 이기적이다.

작업과 결혼은 양자택일이라고들 생각하는데, 그들은 둘을 모두 갖고 간다. 그들은 남들의 두 배의 시간을 살아내면서 자기를 표현하려고 한다. 그것은 사회적·공적 인정에 대한 것이기에 앞서 그런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줌의 시간을 뜯어내고 그것을 공간화하길 멈추지 않는 나의 이기심, 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작가 최성임의 표현대로라면 너무나 “사소한 저항”이다. 과거 여성들은 미술사에, 의미 있는 작가들의 계보에 속하지 않았을지라도, 설사 이름을 얻지 못했지만 계속 작업을 했고, 그런 작가들을 발굴하거나 그들에게 가치를 수여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담론일 것이다. 집을 나간 노라나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 선녀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작가들은 알 수 없는, 그저 틈이 나면 자신의 살아있음, 자신의 존재, 자신의 감각을 증명할 어떤 것을 하고 있는, 했던 여성들을 ‘이해할’ 언어는 사실 충분하지 않다. 가사노동과 미적 노동을 병행하는 여성들의 “균형감”, 식구들의 입과 자신의 심장을 모두 배려해야 하는 이중의 노동은 사회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유의미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전업, 몰입, 지속, 고립, 집과는 떨어진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들 가정하기 때문이다.

여성 예술가들은 일상을, 더 정확히는 가사일을 미술관으로 갖고 들어간다. 직접적인 저항으로서건, 예술적 실험으로서건, 예술의 확장으로서건 지금껏 남성 예술가들에게는 휴식, 충전, 따듯함으로 전유되어온 집을 또 하나의 사회로서, 일터로서, 정치적인 공간으로서, 대안적인 장소로서 몰수하고 재전유한다. 이것은 여성 관람자들, 지금껏 남성 창작자를 위한 매뉴얼, 관습을 통해 구성된 미술관 경험에 익숙한 여성 관람자들에게도 낯선 경험이다. 심지어 페미니즘 비평에 익숙한 내게도 어떤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은 낯설다. 그 수많은 여성의 경험을 단 몇 마디의 ‘여성의 경험’으로 압축, 요약, 추상화할 수 없기 때문인데 내게 최성임의 작업은 번역, 해석, 전유하기가 힘든 그런 작업이었다. 그녀의 자리가 낯설기 때문이고 그녀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다름 아닌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식은 취미이고 손빨래는 정화의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비혼 여성인 내게 “아이 네 명을 키우면서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는” 최성임이란 작가와의 접속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여성들이기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잘 모르는 여성이었다. 심지어 아이를 모두 키운 뒤에 작업을 하면 될 것을 같은 어디서 배운, 그들이 내면화시킨/각인시킨 문장도 목구멍에서 치밀었다. 그녀의 욕망이 징글징글하고 결국 삶이 징글징글해졌다.

나는 처음에는 자동적으로/기계적으로 당연히 그녀의 작업에서 여성의 일상, 여성의 경험을 읽으려고 했다. 기존 예술에 대한 반발심을 그녀에게 투사하고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 시대에 아이가 네 명인 40대 작가, 첫아이를 낳은 직후 첫 번째 전시를 했던 작가, 작업을 놓고 아이를 키우고 다시 늦은 나이에 작업을 하는 게 당연했어야 할 작가, 가사일과 나란히 작업을 영위해온 작가, 지독하게 이기적인 작가,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고 혹사하는 게 ‘일상/작업’인 작가, 일상과 작업을 구분 짓거나 일상을 온전히 작업으로 갖고 온(그렇게 예술을 해체한) 작가일 수 없는 최성임이란 작가에게서 일상의 따듯함, 일상의 표현, 일상의 심미성과 같은 일상과 예술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일상의 전면화를 기대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의 작업을 ‘보려면’ 그녀의 글과 말을 다시 경청해야 했고, 계속 생각을 하고 또 해야 했다. 더불어 네 아이의 엄마였던 나의 엄마의 삶, 또 단지 일상의 긍정도 단지 일상의 부정도 아닌 그런 예술의 ‘장소’의 출현을 놓고 내게는 없던 생각을 전해 받았으므로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단정한 언어로 뱉어내야 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 <발끝으로 서기>에 들어온 그녀의 일상, 그녀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작용’으로서의 예술이 낯설었다. 집을 개조해 만든 전시 공간 ‘디스위켄드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는 집의 입구에서 이전에는 거실이었을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최성임은 그곳에서 자신이 건사하는 가족 5명, 아니 자신의 것을 포함한 12개의 다리를 설치작업으로 번역해 들였다. 전시장 천정에서 직선으로 내려와 뾰족한 지지대의 끝이 바닥을 딛고 있는 설치물 <발끝>은 우레탄 비닐과 스테인리스 스틸, 뾰족한 팽이를 닮은 황동으로 된 지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른다면 “이불 사이로 삐져나온 아이들의 다리”를 “일상을 지지하는 여러 기둥들”로 해석하고 형상화한 것이다. 이불 사이로 삐져나온 아이들의 다리는 내게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내 엄마의 경험이 아니라 내 어린 시절 경험을 투사했기 때문이다-현실이 아닌 노스탤지어가 작동했다. 그러므로 내 엄마와 같이 연년생 아이를 키운, 키우고 있는 주부-타자의 시선은 아니었다. 최성임은 귀엽고 포동포동한 아이들의 발, 다리의 은유를 부부의 것을 포함한 12개의 무차별적인 기둥으로 전치 시켰다. 어떤 일상, 현실도 읽을 수 없게 추상화되었고 등가화되어 있다. 관람자가 이야기를 상상하고 경험을 밀어 넣고 주관화할 수 있는 1인칭 이야기는 없다. 오직 떠받치는 기둥, 간신히 발끝으로 바닥을 딛고 있음의 은유, 나른하고 서정적인 감정이입을 불허하는 단호함이 있다. 엄마-주부-생활인이 이전에는 거실이었던 공간을 “장악하는/몰수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아는 가정은, 가족은 집에서 쉬는 남자, 엄마 옆에서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져 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 자신의 경험(에 대한 말)을 남의 눈과 입에 다 뺏겨버린 여자의 시선은 바깥으로 제대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무가치하고 심지어 위험한 것일 수 있다. 무임금 노동자, 가족의 음화-그림자인 여성이 입을 열면 집은 그 황량한 바깥으로 화할게 뻔하다. 거기도 사회-바깥이고 거기도 위계가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따듯함은 가사일을 전담한 주부를 뺀 채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집의 일부, 집을 떠받치는 기둥이기 때문이다(루이즈 부르주아의 초기작이 생각한다). 최성임은 심지어 자신의 자리, 역할을 식구들 모두에게 분유(分有)함으로써 자신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의 위계를 역전시키고 있다. 심지어 최성임은 자신이 건사하는 가족의 12개의 다리를 “발끝”으로 수렴하게 만든 뒤 거기에 자신의 위태로운 경험을 접붙인다-강제로/폭력적으로 나누려한다. 즉 아이들의 발은 사랑스럽다는 무딘 은유에서 시작한 작업은 종국에는 “발끝”에서 “나를 짓누르는 창살과 같은 십자가, 고관절을 다쳐 누워 계시는 굳어가는 할머니의 발”, 그리고 드디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뛰어내릴 요량으로 “베란다 끝에 서 있는 발끝”, 자신의 발끝까지 확장되면서 가족 서사는 개인적 환유의 연쇄로 내려꽂힌다. 발끝에서 시작된 작가의 환유적 전치는 안과 밖, 가족 공동체와 개인의 자의식이란 화해불가능한 두 자리를 모두 포섭하면서 거실을 언캐니하게 만들어버린다. 아이의 발과 할머니의 발, 생과 사는 언제나 인접해 있지만 그것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은, 먹이고 살리고 건사하는 노동자일 뿐인 그러면서도 부분에 함몰되길 거부하는, 전체를 관하려는 생활 속 여성-예술가의 ‘깨어있음/감각’이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는 잠언을 아이를 기르는 여성-예술가가 가시화했다. 도처에 깨달음, 역설, ‘진리’가 있고 그것을 줍는 것은 일상의 철학자, 그렇다고 느리게 걷고 구경하며 전체를 관하는 도시 만보객(flâneur)이 아닌 부엌과 거실을 오가는 생활인이었다.

최성임은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이들은 다르게 클 것이다. 자기를 잃지도 놓지도 않으려는 엄마를 둔 아이들, 작업하는 엄마, 가족과 집에 대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엄마, 작업을 할 때는 자신들에게 ‘등’을 보이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그럴 것이다. 나는 내가 짐짓 모른 체했던, 가부장제 속 엄마의 역할을 방관했던,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어리고 무지했다고 항변하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 엄마의 자리를 또 지우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우리들의 발, 다리를 욕망했지만, 대신에 최성임은 엄마의 눈, 감각, 자리에서 그 모든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동시에 엄마의 소외와 분열과 접속시킴으로써 단지 가족을 부정하는 것도 단지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아닌 복잡한 텍스쳐 만들기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최성임의 글과 작업을 목격하면서 용서받고 있기도 했다. 일상은 모순이고 가족은 복잡한 것이고 삶은 불가해한 것이다. 일상은 밋밋하게 단순하게 읽힐 수 있는 누구나 아는 사소설, 누구나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일기도 아니다. 일상은 무서운 것이고 고통스런 것이고 잔인한 것이다. 그것을 현모양처로 보이는, 가정과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예술가 덕분에 또 알게 된다.

담담하고 단단하고 강렬하고 치밀하고 정직하다. 최종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읽고 줄 친 여성 작가들의 문장들, 자신의 일기, 끄적거린 메모도 전시에 포함시키고, 관람자가  가져갈 수 있게 만든 것도 눈여겨 볼만했다. 문학과 예술,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은 불이(不二)였으니까. 잇고 나눠주고 깃들고 확장하고 끌어들이기.

최성임 자신을 위한 방, 혹은 “작가의 방”이라고 볼 수 있는 거실 옆 전시장에는 <황금이불>, <오래된 무늬>, <발끝으로 서기 드로잉>이 설치되었다. 천재 예술가들처럼 수개월에 걸친 시간을 집중, 몰입하면서 작업할 수 없는, 착상·모색·과정·축적·질적 변형으로서의 작업이 불가능한 작가, 가사일 사이사이의 짬, 틈, 사이를 이어붙이는 게 곧 작업인 자신의 조건/운명에 충실한 작가는 대신에 “일상의 시간과 동등한 부피로 시간을 잡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누구보다 네 아이를 사랑하는, ‘충분히 좋은 엄마’(도널드 위니캇이 말한)이면서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 작가가 창안한 작업 방식은 “물리적 시간”을 증명하는 작업이었다. 가족을 위한 노동이 5시간이었으면 딱 5시간만큼 나를 위한 노동을 하는 것. 그 시간을 확보하는 것. 늘 깨어 있는 것. 필사적으로 살아내는/있는 것. 그래서 “수개월 짠 황금이불”이나 “45,000개의 공을 양파망에 집어넣는 작업”이나 “빵 끈이나 비닐로 바닥이나 공간을 덮는 작업”이었다. 감동적인 것도, 스펙타클한 것도 아닌, 그저 시간, 텅 빈 시간, 쓸모없는 것을 만든 시간을 증명하는 것. 최성임은 노련한 기술, 그러므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수공업적 작업을 만들지 않으려 했고(그녀가 해 준 말이다), 누구나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성적’ 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역설적이지만 가사 노동이 의미 있는 것으로 재출현하게 될 것이었다- 일상을 몰수하는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사노동의 ‘무의미’를, 그것의 기능성을 방증하려면 가사노동만큼의 시간을 할애한 미적 노동도 무의미한 것이어야 한다. 예술이 무의미한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예외적 시간, 공간에 대한 것인 것은 삶이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삶에 제대로 된 예의를 취하려는 인간의 자의식적 행위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엄마-예술가는 바로 그런 진실을 일시적으로 유예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보류하려는 자리, 장소일 것이다. 최성임은 이 시간과 저 시간을 잇는 중에 잠시 ‘남은’ 시간, 아이들은 “마블 시리즈를 보라고 영화관에 넣어 놓고”, “수영장에 풀어 놓고” 그 옆에서 작업 노트를 쓰고 잇고 뜨고 짜는 작업을 했다. 그녀의 손이 많이 간 작업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노는 아이들이 “만질 수 있고 망가뜨릴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 가방에서 꺼내 들고 계속 할 수 있는 가볍고 값싼 물질로 된 작업,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욕망하는 존재임을 ‘바깥’에게 알리는 작업, 단지 희생과 헌신에 만족하는 그렇기에 자신의 욕망을 배려하지 않기로 선택한 여성이 아님을 알리는 작업.

최성임의 표현처럼 그녀의 작업은 “일상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직 작업으로 일상을 덮은, 거기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그녀가 만든 황금이불은 빵 끈으로 만든 이불이다. 황금색인 것은 맞지만 이 이불은 덮을 수 있는 것도 어떤 정서적인, 미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업도 아니다. 그것은 안으로 들어가 누울 수 없는 이불이고, 언젠가 읽었던 새가 된 오빠들을 이곳으로 오게 하기 위해 소녀가 침묵 속에 가시로 지은 옷처럼 인간은 입을 수도 덮을 수도 없는 이불이다. 최성임은 일상을 연상시키거나 일상과의 화해를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사소한 소재와 물질로 일상을 가리키는 제목을 사용하면서도 일상을 작가의 관점에서 ‘덮는/몰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사랑하는 가족이건 고된 일상이건 무의미한 삶이건, 그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오직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만 채워지는 부피나 넓이,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는/쓰는 시간을 장악할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텅 빈 시간의 존재를 증명할 작업을 한다. 자신을 사용하는 집이 아닌 자신이 사용하는 집을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녀의 작업에서 아무런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그 자리가 텅 빈, 어떤 인간화된 감정, 가령 따듯함이나 평온함이나 사랑스러움과 같은 가정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감상성을 걷어낸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없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있는 시간에 충실했던, 그럼으로써 마침내 사이사이에 고인 없는 시간을 물리적으로 떠내고 증명한, 그것을 드로잉이나 이상한 뜨개질이나 기이한 모여있음으로 채우는 무익한 노동. 집에서 나가지 않은 여자가 집을 장악하는 방법. 예술. 여성 자아, 주관성의 물리적 현시에 불과한. 텅 빈 자리에서의 미적 노동.